하나님의 사람
오순절, 성령강림의 의미는 무엇인가? 본문
본문 : 행2:1-4절
제목 : 오순절 성령 강림의 의미
Ⅰ. 들어가는 말
성령에 대한 생각은 다양하고 민감한 부분이어서 많은 오해와 분쟁의 소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비롭고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순절 성령강림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문제는 성도의 신앙생활을 너무 판이하게 바꿀 수 있는 중요한 분이기도 합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사도행전 전체를 이해하는 것에 있어서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여기서 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오순절 성령 강림의 현상적인 부분과 성령 충만한 제자들의 모습이 모든 신자들이 동일하게 경험해야하는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성령 충만에 대한 분명한 확인과 경험이 있어야 하고 과거 한국 교회를 어지럽게 했던 것처럼 예수를 믿으면 구원은 받지만 성령을 받는 것은 좀더 고급한 수준의 신자에게 있는 것이며 그 증거로 방언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다라서 성령 충만은 곧 방언을 말하는 것인 양 오해되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그리스도인일 수도 없다고 말씀합니다. 롬8:9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그랬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성령을 받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을 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께 속한다는 것입니다(롬8:9).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성령 안에서의 삶입니다. 갈5:16절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성령께서 우리 속에 내주 하심으로 그리스도인의 특성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5:22). 그러므로 율법으로는 결코 이룰 수 없었던 것들을 성령께서는 이제 우리의 속 사람으로부터 성취하시는 것입니다(롬8:1-4). 따라서 성령께서 내주 하시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존재할 수 없으며 성령 충만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힘이 없고 연약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어느 곳에서도 방언 받지 못하면 성령 받지 못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곳은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오순절 성령강림과 동일한 양상의 성령 강림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 없습니다. 다만 방언을 했던 기록들을 종종 찾아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생각들은 오순절 성령 강림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이 지금도 동일하게 있어야하는 모든 신자의 경험이냐 아니면 그 시대에만 독특하게 있었던 단회적인 사건이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오순절 성령 강림의 현장으로 가게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는 현장을 보게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현장에서 어떤 논란 거리를 찾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건으로서 그 현장을 목격하면서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서 오늘을 사는 우리가 어떤 자세로 신앙 생활을 해야할 것인가, 특히 성령세례와 성령 충만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고 신앙 생활을 해야할 것인가를 정리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 생활을 전체를 놓고 본다면 바른 분별력을 키우는데 대단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앞으로 몇 번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서 이 부분을 정리해 가는 동안 성령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우리가 가운데 생겨나기를 원합니다.
Ⅱ. 본문 관찰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관찰이 가능합니다. 우선은 현상적인 부분들에 대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현상적인 부분들은 왜 필요했는가를 정리해야합니다. 그리고 다른 한 부분은 전체적인 조망 가운데 오순절 성령 강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현상들을 중심으로 현상들을 설명하고 현상들이 가지는 의미를 밝히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주로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헛되지 않은 기다림
우리는 이미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당신이 부활하신 사실과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가르치신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모인 제자들에게 약속을 주십니다. 어떤 약속입니까? 두 가지였습니다. 첫 번째 약속은 “너희가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 약속은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그 주님의 약속을 기다리며 성전에 모여서 찬양과 감사를 그리고 다락방에 모여서 전혀 기도에 힘쓰는 날들을 보낸지 열흘이 지났을 때 첫 번째 약속이 성취되었습니다. 창21장의 하나님은 25년의 훈련 과정을 통해서 이제야 준비가 되었기에 이삭을 선물로 주시는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은 ꡔ말씀대로ꡕ를 강조하시면서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민23:19)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묵상하는 것은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의 기다림이 헛되지 않음에 대해서 말씀해 줍니다.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은 본 그대로 오시겠다는 약속처럼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다림은 헛된 것이 아니며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그 기다림에 새 힘을 얻으시고 다시 한번 깨어 기도해야할 이유를 공급받으시는 시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또 한가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초대 교회의 태동이 어떻게 시작되고 있는가를 눈여겨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에게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는 시점에는 항상 수식어가 따라붙습니다. 어떤 수식어입니까? 그것은 ꡔ모여서ꡕ입니다. 아직 교회로서의 틀이 잡혀지지 않은 초대 교회 공동체 사람들은 무슨 주일 예배라든지 수요 기도 모임이라든지 하는 형식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누가 모이라고 강권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들은 모여야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모였습니다. 이것은 마치 제 3차 포로 귀환을 주도했던 느헤미야 시절에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수문 앞 광장에 모여들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감히 말씀드립니다. 모이기를 게을리 하고는 영적인 생명의 풍성함을 맛보기가 쉽지 않다고 말입니다. 현재 우리에게 있는 모임보다 이 때의 모임은 훨씬 더 많았고 비정규적인 것이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은 시대가 분주해져서 모이는 일이 부담으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주해서 모이지 못하는 것과 모이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전투하는 교회, 나가서 치열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약함이 없지만 모여서 힘을 공급받고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배우는 일 또한 중요합니다. 이것을 균형 잡히게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2. 오순절
본문은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라고 사건의 시작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순절을 성령강림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오순절 계통의 교회라는 말과 성령의 사역을 중요하게 그것도 특히 은사적인 사역을 중요하게 하는 흐름을 일컬어 ꡔ오순절 계통ꡕ이라고 하는 것은 아마도 여기서 기인된 것일 것입니다. 오순절에 성령 강림이 있었고 그런 현상적인 것들이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원래 오순절은 유월절이 시작되는 날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입니다(레23:16). 오순절은 유월절 기간 동안 처음 익은 보리 곡식단을 제단에 드린 날로부터 시작하여 밀 추수로 끝나는 49일(7주)간이 추수기간 다음 날이기 때문에 '칠칠절'이라고도 합니다(출34:22; 신16:10). 또한 이 날은 처음 수확한 밀을 가지고 떡을 만들어 제사를 드리는 절기이므로 '맥추절'(출23:16) 혹은 '초실절'(출34:22)이라고도 합니다. 이 때는 소제와 번제가 드려지는 거룩한 날이며(레23:17이하), 애굽으로부터 구원받은 것을 회상하며 기뻐하고 감사하는 날인 것입니다(신16:12).
바벨론에서 귀환한 후 오순절은 유대교의 큰 순례 절기들 중의 하나가 되었는데 이 순례 절기 때면 로마 제국 내의 머나먼 곳에서 살고 있던 수많은 유대인들이 예배하러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곤 했습니다(행20:16).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오순절은 1세기에 살던 유대인들을 하나로 연합시키는 역할과 그들의 역사를 회상케 해주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에 “그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라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의하면 그러한 기쁨의 절기가 성령께서 바람과 불과 같은 모습으로 강림하시므로 새 시대를 여는 날이 되었습니다.
3. 성령 강림의 현상적인 부분(2-3절)
이 부분은 세 가지로 관찰이 가능합니다. 첫째는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를 동반하고 임한 성령입니다. 두 번째는 불의 혀같이 시각적으로 임한 성령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성령 충만함의 결과로 나타난 방언입니다.
1) 급하고 강한 바람같이 임한 성령
우선 홀연히 라는 말씀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말은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주님은 제자들에게 언제 어느 시에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어떻게 보면 막연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막연한 것처럼 보이는 시간들을 제자들은 함께 모여서 말씀을 읽으며 찬양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보내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의 기다림은 간절한 것이기는 했지만 바로 지금이라고 하는 절박한 기다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다만 그들은 깨어 기도하며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갑자기 성령께서 강림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귀중한 교훈을 얻습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 또한 우리가 전혀 기대하지 않고 있는 시점에 홀연히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원하지도 않고 기대하지도 않은 시점에 주님은 홀연히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로 오늘 성령 강림을 준비한 제자들과 같은 종말론적인 삶의 태도는 우리를 영적으로 안정되게 해 줄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의 기도와 기다림이 어떤 열정적인 환각상태에서 성령 강림을 맞이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멀쩡한 정신을 가지고 있었고 다만 모여서 힘써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홀연히 임한 첫 번째 표지는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였습니다. 왜 하필이면 바람이라고 했을까요? 우선은 '영'(πευμα, 프뉴마)이라는 단어의 어근이 '바람'(πνοἠ, 프노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성령을 나타내는 단어 루아흐(ꖙוּꙞ)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중생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3:8)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구약 왕상19:11절에서는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라고 말씀합니다. 시104:4절에서는 “바람으로 자기 사자를 삼으시며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성령의 임재를 바람으로 표현하는 것은 이곳에서만 발견되는 사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람과 성령은 같은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다만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제자들이 앉은 집에 가득한 채 떠나지 않은 것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성령의 강림을 가시적으로 드러내 주는 현상에 불과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성령 강림은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와 같아야 한다고 말하면 문제가 됩니다. 뒤에 종합적으로 정리하겠습니다.
2)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서(3절)
앞의 바람이 청각적인 묘사라면 이것은 시각적인 묘사입니다. 불이 임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모양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사야가 하나님 앞에 부르심을 받던 6장의 장면을 기억하십니까? 그 때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 졌느니라 하더라”고 했습니다. 불은 정결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구약에서 여러 번 하나님의 임재를 불로 표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출3:2-5; 13:21; 24:17; 40:38). 복음서에서도 성령의 오심을 불과 밀접하게 관련시켜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마3:11; 눅3:16). 또한 소돔성에 임한 불 심판을 기억하고 있는 우리는 심판의 불도 같이 연상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급하고 강한 바람소리와 함께 불의 혀와 같은 모습이 방안에 있는 제자들에게 임했습니다. 역시 이 본문에서도 잠시 임했다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머물러 있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그때의 광경을 상상해 보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성령의 오심을 기다리며 기도하고 깨어 있었던 제자들에게 강림한 급하고 강한 바람소리, 그리고 불의 혀같이 보이는 성령의 임재를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3)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함(4절)
우선 생각하실 것은 성령의 충만함은 성령 세례와는 다른 것이라는 점입니다. 성령의 충만은 여러 번 되풀이 될 수 있어서 구원의 때 뿐 아니라 그 후에도 계속 일어날 수 있습니다(4:8, 31; 6:3,5; 9:17; 13:9,52). 그러나 성령의 세례는 구원의 순간에 모든 믿는 자들에게 단회적(one for all)으로 일어납니다.
따라서 본문의 성령이 충만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성령세례와 성령 충만이 거의 동시에 일어났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즉 성령 충만하지 않은 그리스도인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늘 성령 충만하기를 원하지만 사실은 충만할 때보다는 그렇지 못할 때가 많은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한 제자들의 입에서 다른 방언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바벨탑의 사건을 통해서 사람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셔서 그들을 흩어버리셨습니다(창11:1-9). 그런데 제자들이 성령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게 된 이 사건은 혼잡케 되었던 언어가 다시 회복된 것으로서 새시대의 도래를 예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령을 받고 자신들이 아직 배운 바가 없는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고, 다른 여러 지방에서 온 사람들은 그것을 알아들었을 뿐만 아니라 의아해 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의지로 지성으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갈릴리 촌사람들로서 외국어를 그것도 그렇게 많은 나라의 언어들을 구사할 만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 방언은 뒷날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나 로마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면서 언급했던 방언과는 다른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방언은 말 그대로 다른 나라 말, 외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는 것입니다.
자 여기서 한 번 질문하고 지나가겠습니다. 성령 강림은 꼭 이렇게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를 동반하고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보일 뿐만 아니라 각기 다른 방언으로 나타나야 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사도행전의 다른 부분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에 관한 언급은 8장 10장 19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8장은 사마리아에 임한 성령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데 현상에 대한 설명은 없고 다만 성령을 받았다고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알 수 있었다는 점에서 뭔가 현상들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누가는 현상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10장에는 고넬료의 가정에 임한 성령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10장에서는 방언을 말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것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2장의 성령 강림과 같은 현상들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19장에는 에베소에 있는 사람들이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했다고 말하는데 바울이 복음을 잘 풀어서 가르치고 안수하니까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런데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방언을 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나 2장에 나타난 현상들은 다시 반복되지 않았습니다. 왜 이런 차이를 나타냅니까?
우선 요1:3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고 말합니다. 그래서 세례를 주면서 누구에게 성령이 임하는가 자세히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마3:16절에 의하면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그랬습니다. 그럼 여기서 우리가 질문하고 지나갈 것이 있습니다. 성령이 주님이 성령 받으시기 전에는 없었습니까? 또 주님이 30년간 사실 때에는 성령의 보호하심 속에 사시지 않았겠습니까? 또 주님이 성령을 받으셔야만 했습니까? 우리는 아니다라는 답변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창1:2절에서 “하나님의 신이 수면위에 운행하시더라”는 기사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최초의 성령 출현이라는 사실은 일반적으로 동의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새삼스럽게 성령을 받으셨을까요? 그것은 주님의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위한 가시적인 인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십니다.
마찬가지 이유를 들어서 제자들에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행1:5절입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그럽니다. 그리고 열흘 후에 오순절 성령강림이 있었습니다. 성령시대가 개막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구원계획(GOD'S design)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즉 이 땅에 성육신 하시고,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고난 당하시며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고, 십자가에서 온갖 조롱과 채찍에 맞으시고 죽으시고, 말씀대로 3일만에 부활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시고, 승천하시기까지의 사역을 끝내시고 약속하신 대로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셔서 성령시대, 이른바 적용의 시대를 개막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적용의 시대, 성령시대를 개막하심에 있어서 가시적인 인증! 그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은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때는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행2:2-3절)그랬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바톤 터치 하셨다는 것이지요. 성령시대가 개막되었다는 것입니다. 새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Ⅲ. 결론과 적용
이것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여기 참 아름다운 자매와 형제가 뜨겁게 열애를 했습니다. 그런데 둘만 좋은 겁니다. 그렇게 둘만 좋아지내다가 안되겠다 이제는 함께 살자 싶어서 양가 부모님들에게 인사를 합니다. 그리고 결혼식 날짜를 잡아서 참 단촐하고 아름다운 결혼식을 했습니다. 여러분! 이 결혼식은 무엇 때문에 합니까?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에 “우리 이제 함께 한 이불 쓰면서 살겠습니다”라는 가시적인 인증입니다. 사실 혼인 신고만 하면 함께 한 이불을 써도 법적으로는 무방합니다. 그러나 결혼식을 하지 않고 살면 평생 마음에 짐을 가지고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아이 낳고 한참을 살다가도 결혼식을 하는 것입니다. 왜요? 결혼식은 법적인 것이 아니라 가시적인 것이요, 정서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요? 이 결혼식을 심심하면 한 번씩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결혼식은 한 번이면 족한 것이지요. 지금 재혼을 말씀드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번 결혼식을 했으면 그 다음은 서로 화목하게 사랑하면서 잘 살아야 합니다. 연애시절에는 서로 생활을 공유하지 않기 때문에 좋은 것만 보입니다. 그러나 결혼해서 살다보면 생활이 보입니다. 훨씬 어렵지요.
눈에 보이는 현상적인 성령 강림은 결혼식과 같은 것입니다. 성령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이지요. 더구나 각기 다른 나라말로 방언을 하지 않았습니까? 이 때 했던 방언은 아주 특수한 것입니다. 뒤에 나오는 방언은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때 했던 방언은 방언이 아니라 외국어였습니다. 그래서 각 나라 사람들이 다 알아들었습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행1:8절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그랬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외국어를 주셨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땅 끝까지 가게 하겠다는 주님의 말씀에 대한 성취인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 생활에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만약 오순절 성령 강림을 결혼식과 같은 의미로 보지 않고 매번 그와 같아야 한다고 이해하게 되면 어떤 폐단이 생깁니까? 결혼식을 올리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낭만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그래서 서로 너무나 다른 환경 속에서 자라온 것들을 하나씩 맞추어 가야 합니다. 그 속에는 가장 기본적인 세계관에서부터 물질관, 경제관, 애정관 등등의 것들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맞추어 가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맨날 결혼식 때가 좋았는데 하면서 그 때의 경험이 반복되기를 기다린다면 이것은 참으로 심각한 일인 것입니다. 더구나 그 때의 현상적인 것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면 맨날 결혼식만 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활은 그렇게 현란하고 낭만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현실이기 때문에 차분하고 냉철한 것입니다. 그런데요? 진짜 사랑은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고뇌하면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알아 가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주님을 깊이 알아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은 한 편으로 이해가 가지만 틀린 말입니다. 그때로 돌아가서는 안됩니다. 20년을 동고 동락한 부부가 이제 막 결혼한 부부처럼 살 수 있습니까? 그것은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신혼의 기쁨이 현상적이고 이제 막 함께 한 뜨거운 것이라면 신앙 생활의 연조가 깊어진 기쁨은 우리의 뿌리깊은 죄성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이해하고 받아주는 사랑의 기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순절 성령강림의 현상적인 것들은 지금도 꼭 그래야 한다고 주장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인격적인 성령의 내주하심을 경험하면서 우리의 신앙 인격과 성품이 더욱 주님을 닮은 것으로 성장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 시대의 개막으로부터 벌써 여러 세기가 지난 우리의 삶의 모습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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